팔마를 든 예수상
성지를 오르는듯 보이는 돌 거북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이다.
절두산 순교성지 십자가의 길 안내문
김대건신부 좌상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절두산 성지 성당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섰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현재 서울 양화대교의 북단쪽에 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절두산 기념 성당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절두산 성지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 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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