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 ~ 1890 7월 30일 (네덜란드)Vincent Van Gogh
1853년 3월 30일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빈센트가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1881년 12월이었다.
1890년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그림은 879점이었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던 반 고흐, 한때는 광산촌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정열을 불태웠지만
그의 운명은 캔버스를 떠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빛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희롱을 화폭에 담고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빛과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는 화면을 통해 숱한 사람들의 비어 있는 내면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날마다 예술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 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졌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그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에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뇌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뇌넨에서 보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풍경·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웨르펜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폴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지방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4년 전 뇌넨을 떠난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마침내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1891. 1. 25) 만성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수틴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형을 무조건 믿었던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다.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20세기초부터 주로 다른 화가들에 의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그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높아져가고 있다.
태양의 화가 반 고흐, 영혼의 화가 반 고흐의 그림에는 삶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진한 애착과 영혼을 꿰뚫는 투명한 관조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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