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들,바다에서..

산정호수 궁예(弓裔)像





궁예(弓裔)는 통일 신라 후기에 후고구려(후에 태봉으로 국호 변경)를 건국한 인물이다.

후고구려는 통일 신라, 그리고 견훤(甄萱)이 세운 후백제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궁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 남아 있다.

흔히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는 과대망상에, 포악한 성품으로 학정을 일삼았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궁예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 고려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무능력한 신라 지도층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했으며,

고려라는 새 왕조가 탄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궁예는 원래 신라 사람으로,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후고구려(처음에는 고려, 다음에는 마진국, 다시 태봉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음)를 창업했던 궁예(弓裔)는

그가 가장 신임하던 부하 장수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수도 철원 풍천원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명성산으로 퇴패했다.

그를 따르던 심복 신하와 군사들은 추적해 온 왕건의 군대와 최후의 접전을 벌였으나 다시 대패 하였다.

다시 쫒기는 몸이 된 궁예는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던 신하와 군사들에게 왕건에게 항복하여

여생을 이으라 이르며 눈물의 별리를 할때, 주인 잃은 말도 울고 신하들도 울고 궁예도 울어

천지는 울음소리로 그득하였다 한다.

그들과 작별을 한 뒤 산성에 혼자 남은 궁예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통곡을 한 뒤

자결로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로 이 산은 명성산으로 불리었다고 하니 푸르디 푸른 산정호수 물결에 비치는 명성산은

아름다웁기보다는 비장감이 앞선다.

슬픈 역사를 품은 명성산 산중에는 지금도 궁예가 은거했던 성지 등 유적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다.


'산,들,바다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천지 옆   (0) 2016.05.26
지난 겨울..그리고..  (0) 2016.05.22
포천 산정호수 낙천지폭포  (0) 2016.05.21
조형물  (0) 2016.05.20
대부바다향기테마파크  (0)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