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출구로 나와보니 아직도 가을인가..를 착각케하며 반겨주는 억새들..
곁에 서있는 앙상한 나목만이 계절을 알려준다.
6봉을 오르는 들머리로 얼마쯤 지나니 아래와같은 안내판이 보인다.성묘 란다.
성묘라고 쓰여진 입간판 (각세도 리선평의 묘 )
잠깐 몇컷 담고..
각세도의 도조 이선평은 서울 낙산 밑에서 살았다 하여 ‘낙산도사’라고도 하는데
한때 수십 만명의 신도를 거느렸으면서도 평생을 나물죽과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단칸 셋방에서 살았던 청빈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 지붕의 추녀 끝과 방문틈에 새끼줄처럼 꼬인 종이들을 달아 놓았는데
이 종이 속에는 그가 받은 계시문을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각세도의 경전인 훈사(訓詞) 상하권이 되었다고 한다.
교조를 도조라고 칭하는 각세도의 이선평은 황해도 신천군 구월산 아래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이선평은 일제시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의병이기도 하다.
왜경의 수사망을 피하여 연안에 숨어 있으면서 유불선 및 기독교, 동학의 경전들을 독파하던 그는
32세 때 되던 겨울 성경문답편(聖經問答編)을 읽다가 문득 우주삼라만상을 창조하고 섭리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그 이치를 전해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천지부모(天地父母)임을 자각하고
구월산 비봉산 상봉에 들어가 1000일 기도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눈이나 비, 바람을 피하지 않고 수도에만 전력투구 하였더니
늘 선관(仙官)이 와서 선식(仙食)을 주고 들짐승이나 새들까지 찾아와 지켜 주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빠진지 488일만인 1915년 4월15일 정오에 남쪽하늘이 크게 진동하여 보니
황금대자로 된 각세도(覺世道)란 큰 글자가 공중에 떠 있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또 다시 공중에 원각천지(圓角天地)
무궁조화(無窮造化) 해탈사멸(解脫死滅)
영귀영계(永歸靈界)라는 16자로된 원각주(圓覺呪)가 떠 있어 이를 받았고
그 후 5월 초하루부터 매일 한자씩 받아 그믐날까지 30계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도기(道旗)와 도가(道歌) 그리고 훈사(訓詞) 법문(法文) 천서(天書)등을 차례로 계시를 받아
그해 9월에 천일기도를 끝마쳤다고 한다.
기도를 마친 이선평은 계시와 신비체험을 통해 얻은 도명(道名) 주문(呪文) 도기(道旗) 훈가(訓訶)등을 받은후
천지부모님의 대권대법을 전수했다고 확신하고 나서
1915년을 도화원년이라 하고 스스로 도조(道祖)가 되어 각세도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각세도가 창설된지 10년만에 교세가 27만명으로 늘어나는 등 대단한 성장을 하였다.
이곳의 주요교리는 도조 이선평이 하늘에서 받은 16자 각세 주문속에 함축되어 있다.
천지의 본원(本源)인 영적 진리를 원만하게 깨달으면 무궁한 조화가 각기 자신에게 주어짐을 알게 되고
영롱한 조화 경지에 이를 때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영계로 복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도들은 주문을 외우면 자연히 통령이 되면서 유불선 야의 합일된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
신비한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도조 이선평이 신도들에게 준수하도록 만든 도조 십계(十戒)가 있다.
1. 천지부모 지성으로 흠숭하라.
2. 천지부모 지성으로 효도하라.
3.화일법회 거룩하게 봉행하라.
4. 생각과 말과 행위를 빠르고 둥글게 지키라.
5. 과분한 소망과 과도한 유한을 갖지 말라.
6.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7. 화친하고 공경하라.
8. 자존과 자만을 갖지말라.
9. 미신을 타파하라.
10. 새 말씀을 전하여 인도구활하라.
도조 이선평은 선천건도(先天乾道)의 말세구활(末世救活)을 하고
후천곤운(後天坤運)의 새 천지, 새 세계를 열어 지상낙원인 정효대화세계(正孝大化世界)를 이룰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따라서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는 선천시대의 종교로써
이들의 신앙의 근본은 하늘을 공경하는 형이상학적인 종교이고
각세도는 경천위지(敬天爲地)의 천지부모님을 신봉하고
효도하는 것을 신앙으로 바로 세운 후천시대의 종교라고 말한다.
암릉을 오르다 보니 다시 눈에 띄이는 거대한 암석..
이어 나타나는 관악 일명사지 석조물 터
불교미술의 일면
[경기도기념물 제191호]
정부과천청사 뒤로하여 관악산 제6봉으로 오르는 도중 중간쯤에 폭포가 있고 이 폭포에 서 오른쪽으로 약 50m정도 오르면 약400여평의 대지에 정남향으로 자리한 곳이 일명사지이다.
1999년 발굴조사 결과 복엽8판연화문대석2점,단엽8판연화문대석1점,석탑재 등이 발견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암막새기와 조각 20여점이 혼재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평기와는 숭문,여골문,직선문,격자문,사격자문, 파도문,기와복합문,무문등의 문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범어(인도어)가 표시된
숭문기와,사설문기와, 및 무문의 소와(小瓦)는 통일신라로 구분된 것이기 때문에 일명사는 통일신라 하대에 창건되어 조선중기인 18세기까지 존속 되었던 사찰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지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고된 적이 드문 고찰(古刹)로 비교적 원형을 잃지않고 있어 수도권의 불교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문화적 가치가 높은 사지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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