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암을 이용한 고려시대 중엽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인데, 지표면에 기단중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어
매몰된 본래의 기단이 1층인지 2층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 드러나 있는 넓직한 기단은 이 탑을 일단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
4 매로 짜맞춰 구성한 중석은 각 면에 2개의 우주와 가운데에 탱주를 세웠으나 자연석에 가까울 만큼 표면의 마모가 심해 선이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다.
그 위에 갑석을 놓고 방형의 연꽃조각 굄대를 놓았는데, 연판의 배치가 모서리에 이를수록 약간 기우는 형이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게
고려시대 연화문 배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연화문 받침이 유난히 큰 1층 몸돌을 받고 있고, 1층 지붕돌부터는 지붕돌 위 몸돌을 하나의 돌로 다듬어 올렸으나
6층과 7층의 몸돌은 따로 돼 있는 점도 이 탑의 특징으로 꼽을 만하다.
문양이 없는 몸돌은 양쪽에 우주가 얕게 새겨져 있고, 몸돌의 두께는 일정하며 2층부터는 사방의 크기만 급격히 작아지는 체감률을 보이고 있는데다,
상륜부를 모두 잃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다.
썩 품위 있는 탑은 아니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정연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이 탑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붕돌의 모서리가 많이 떨어져나가는 등 심하게 훼손되었다. 보물 제77호이다.
이 탑 부근에는 여러 사찰이 있었다고 전하며, 이곳이 고려 충원사(沖圓寺)터였음이 밝혀진 것은 조선 인조(1623~1649 재위) 때이다.
“충원현감(忠原縣監) 유정립(柳鼎立)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석등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지층에서 충원사명(沖原寺銘)이 있는 불기(佛器)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이 곧 충현사터였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또 ‘석등 부근’이란 기록으로 보아 이 탑 주변 어딘가에 석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지금 이곳엔 석등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마을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등을 보이고 있는 신동아아파트를 짓기 전까지는 이 일대가 미나리밭이었으며
탑 주변으론 찰랑찰랑 물이 차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아파트가 설 무렵까지 유물은 더러 남아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지만 안타까운 짐작일 뿐이다.
**7층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탑이나 훼손이 심하고 검게 그은 듯하여 궁색해 보이지만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는 굄대의 연꽃조각이 두툼하면서 힘이 있다.
보물 제77호. 높이 5.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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