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냥..일상들~~

청송심씨 본향 덕천마을





















靑松沈氏 本鄕 德川마을(청송심씨 본향 덕천마을)


山川(산천)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인심 또한 후덕하니

이곳이 바로 우리 청송심씨의 貫鄕(관향)이다.

우리의 시조 文林郎公 諱 洪孚(문림랑공 휘 홍부)께서는

이곳을 관향으로 득성(得姓)을 하시고 뿌리를 내리시어 두 아드님을 두셨으니

長(장)은 閤門祗候公(합문지후공) 諱(휘)가 淵(연)이요,

次(차)는 奉翊大夫公(봉익대부공) 휘가 晟(성)이시다.

휘 淵이 또 아들 한 분을 두시니 이분이 靑華府院君(청화부원군)이요 휘가 龍(룡)이시다.

휘 龍께서 또 두 아드님을 두시니 長에 휘가 德符(덕부)요 次의 휘가 元符(원부)이시다.

큰아들 휘 德符께서는 고려 말에 門下侍中(문하시중)을 두 번 하시고

朝鮮朝(조선조)에 들어와 靑城伯(청성백)에 봉하시고 左議政(좌의정)에 올랐다.

다음으로 岳隱公(악은공) 휘 元符께서는 麗末(여말)에 典理判書(전리판서)로 계셨는데

李成桂(이성계)의 易姓革命(역성혁명)으로 고려가 망하자

“忠臣(충신)은 不事二君(불사이군)”이라, 濟(제)나라 충신 왕촉의 道(도)를 따라

杜門洞(두문동)에 드시니 이날이 公의 亡日(망일)이라 하셨다.

두 분 형제께서는 文武兼全(문무겸전)으로 경륜이 높아

나라를 경영하시는데 항상 앞에 나와 계셨다.

靑城伯(청성백)께서 7형제를 두시니 다섯째 安孝公(안효공) 휘 溫(온)이

世宗 國舅(세종 국구)로 영의정이요, 여섯째가 靑原君(청원군) 휘 淙(종)이시니 부마이시다.

安孝公의 女로 世宗 王妃(세종 왕비)를 삼으시니 昭憲王后(소헌왕후)이고

아들 恭肅公(공숙공) 휘 澮(회)가 정승이 되시니 마침내 三代 정승의 家門(가문)에 올랐다.

九世祖 휘 連源(연원)과 휘 通源(통원)은 형제정승으로 甲族(갑족)의 班列(반열)에 들게 하고,

3 王后(왕후), 13 相臣(상신)에 4 駙馬(부미)를 이루니 報本(보본)의 禮(예)를 다 하였도다.

岳隱公(악은공)께서 세 아들을 두시니 첫째가 令同正公(영동정공) 휘가 天潤(천윤)이요,

둘째가 縣令公(현령공) 휘가 天柱(천주)이시고 셋째가 휘 天湜(천식)이시다.

아버님의 가르침으로 風光(풍광)좋은 이곳 德川(덕천)에 터를 잡고

世世年年(세세년년) 後生(후생)을 敎導(교도)하니 어언 世居地(세거지)가 되었도다.

그러나 岳隱公의 유택이 없고 공의 信標(신표)하나 없어 후손으로 민망하더니

이제야 宗人(종인)들의 뜻을 모아 재실을 창건하고 享壇(향단)을 設壇(설단)하여

歲一祀(세일사)를 올리게 되니 이것이 모든 후손들의 敬意(경의)의 뜻이로다.

壬辰(임진 1592)년 4월 17일 왜병 15만 대군이 동해를 덮고

각 방면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오니 국운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11世祖 벽절公 휘 淸(청)께서는 지금이 바로 죽기로 맹세하고 나가 싸울 때라 생각하나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지라 公은 눈물을 흘리시며 어머님께 말하기를

“忠孝(충효)는 함께 하기 어려우나 이 한 몸 바쳐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하니

어머님이 쾌히 허락하셨다.

큰아들 應洛(응락)을 대동하고 倡義(창의)하니 응모자가 80여명에 이르고

여러 장수들과 합세하여 싸우니 왜적들이 못견디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싸움은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丙申年(병신년)에 公이 詩를 지어 말하기를 “같은 하늘아래 원수가 같이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죽어도 걱정이 없다.” 하였다.

丁酉年(정유년) 12월 21일 島山(도산)전투에서 적진에 들어가 혈투를 하였으나

마침내 왜구의 총을 맞고 순절하니 슬프다!

의병으로 전투에 임한지 5년 7개월 만이다.

그 후 300년이 지나 다시 이 지방의 곳곳에서 왜구가 창궐하여

나라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이르렀다.

벽절公의 8代孫 老師(노사) 敦寧府都正(돈령부도정) 휘 誠之公(성지공)께서 분격하여

15명의 親知(친지)와 함께 수백의 의병을 이끌고 倡義(창의)하여 왜구에 항전하였다.

싸움은 격해지고 총에 맞고 칼에 찢겨 온몸이 부서지고 피가 터지는 고통을 견디시며

왜군을 섬멸코자 분전하였으나 끝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생애를 다하여 순절하시니

11世祖 휘 벽절公과 함께 그 이름 靑史(청사)에 남겼도다.

2世祖 奉翊大夫公(공익대부공)은 휘 晟(성)은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長은 判書公(판서공)으로 휘가 련이요 次는 上護軍公(상호군공)으로 휘가 卿(경)이다.

판서공의 후손은 鐵原地域(철원지역)에 뿌리를 내렸으나

상호군공 후손은 世居地가 北方이라 소통할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靑松沈氏는 청송 고을에서 得姓한지 750여 년에 年年이 계승하여 明賢達士(명현달사) 배출하고

英祖(영조) 때 이르러 德川 호박골에서 沈處大公(심처대공)은 萬石의 富를 이루었고

代를 이어 세습하니 7대손 松韶 琥澤公이다.

1880년에 저택을 신축하고 이사하여 현재에 이르니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으며,

마을이 관광지가 된 것은 다 이런 연유 해서이다.

光復(광복) 후에도 이곳 덕천에서 岳隱公 후손 宜渙(의환) 宇永(우영) 두 분 長官과

吉燮(길섭) 明輔(명보) 두 분 國會議員을 배출하여 子子孫孫 번영하니

그 後光이 靑松고을에 찬연하리라.



청송심씨 대종회 문화이사 沈載㤠(심재영) 지음

청송심씨 악은공 19대손 沈相翰(심상한) 건립

'그냥..일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생가  (0) 2021.10.08
쌍무지개  (0) 2021.08.09
찬경루(讚慶樓)  (0) 2021.06.25
매향리 평화마을 조형물  (0) 2021.06.22
유배지 형구(刑具)의 종류  (0) 2021.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