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20여 년의 산고 끝에 완결된 『토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도 하기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지내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 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 떼들아!”
소설가 박경리는 자신이 묘사한 평사리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1960년대 말 소설을 구상할 무렵에 김지하 시인의 아내가 된 딸 김영주와 함께 이곳을 스쳐 지나갔을 뿐. 그런 그녀가 평사리를 무대로 설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 땅에나 있었고, 경상도 안에서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래서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하였다. "
박경리의 『토지』는 4대에 걸친 최참판댁의 가족사와 함께 한 마을의 집단적 운명을 평사리에서 간도·진주·서울·중국·일본 등으로 이동하며 조명한 5부작 16권의 대하소설이다.
분량뿐만 아니라 집필기간도 1969년에서 1994년까지 무려 25년이 걸려,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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