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南樓
한남루는 행궁의 정문으로 영조22년(1798)에 광주유수 홍억이 건립한 누문이다.
궁궐의 제도는 3문이라 하여(황궁은 5문)정전까지 3개외 문을 거쳐서 들어가는것이 법도인데 남한산성 행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전에는 외삼문과 중문만 있던것을 한남루를 대문으로 세워서 삼문삼조의 법도를 완성하였다.
"남한지" "한남루기" 에 보면 한남루의 뜻이 나타나 있는데 한강남쪽 성진의 누대라고 한다.
한남루의 정면 기둥과 후면 기둥에는 8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행궁의 창건.
남한산성행궁의 건립.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인조 4년(1626)남한산성과 함께 건립 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게 된다.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좌전(종묘) 우 와실(사직)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엵활을 했던 매우 중요한 곳이다.
행궁의 문화해설사님이 열심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지금의 산성호텔 뒤편의 언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祖)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11월에는 이 행궁터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 였음이 증명되었다.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관주시 중부면 산성리 938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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