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과 긴장이 사회를 억누르던 1975년 봄, 대학가는 잇따른 시위로 술렁거렸다.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점점 국민들의 목을 조이는 유신정국 속에서, 당시의 대학생들은 사태를 그저 관망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농대 학생들 역시 ‘학원 자유화’, ‘언론 탄압 반대’,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해 4월 4일 농대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의 맥을 끊고자 학생회장과 학생회 체육부장을 즉시 구속했다.
이후 농대 학생들은 구속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 및 단식농성에 나섰다.
그 와중에 4월 9일에는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이 선고 하루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축산학과 68학번으로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상진 열사는 이 부당한 세상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과 동기 및 후배, 그가 속한 서클 ‘한얼’ 회원들과 함께 4월 11일에 집회를 열 것을 모의했다.
그는 집회에서 낭독할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준비했다.
그의 친구들은 이 두 편의 글이 김상진 열사의 유서가 되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4월 11일, 수원캠퍼스 잔디밭 백양나무 아래서 자유 성토대회 형식의 집회가 열렸다.
세 번째 연사로 나선 김상진 열사는 거듭 다듬어 완성한 ‘양심선언문’을 차분히 읽어나갔다.
선언문의 뒷부분에 이르러 그는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칼을 복부에 꽂은 채 비스듬히 그어 올렸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혼비백산의 순간에 그는 친구들에게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수원 도립병원으로 옮겨진 김상진 열사는 수술을 받아 잠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다시 출혈이 심해져 그는 재차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은 실패적이었고 의사는 다음날이 밝아오자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으로 김상진 열사를 옮기도록 조치했다.
구급차로 이송 도중, 그는 26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상진 열사의 시신은 반강제적으로 하루 만에 화장됐다.
화장터에는 사복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족들은 화장 후 남은 유골마저 경찰의 눈치를 보며 몰래 항아리에 담아야 했다.
유골은 한동안 절에 보관되다가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벽제 국제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김상진 열사에 대한 추모가 잇따랐다.
경찰과 관계기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은 언론을 통해 퍼져나갔다.
1988년에는 김상진 열사의 뜻을 기리는 ‘김상진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처음 기념사업회가 꾸려진 이후로 지금까지 실무를 맡고 있는 82학번 정철훈 운영위원은 “(본인이) 학교 다닐 때는
김상진 묘소에 참배만 해도 정학당할 정도라 몰래 다녀오거나 징계를 각오해야 했다”라고 한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다들 ‘이제는 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해 기념사업회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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