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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다에서..

중초사지 삼층석탑(安養中初寺址三層石塔)&건축가 김중업 박물관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이다.

1층 기단이라는 특이한 점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명칭: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

주소: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종목:시도유형문화재 164

지정일:1997.12.26

한자명칭:安養中初寺址三層石塔

테마: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탑

시대:고려시대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앞에있는 옛 안양사 절터에서 사죵했던 석재들~

 

 

 

2014년 3월 개관을 앞둔 김중업 박물관 모습

 

 

 

 

 

남회랑지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옛,안양유원지) 입구에 위치한 유유산업 제약공장은 통일신라 흥덕왕 2년(827)에 세워진 중초사와

고려태조 왕건이 900년에 세웠던 큰사찰인 앙야사가 있었던 큰 절터였다 .

또한 이곳에 소재한 유유산업 공장 건축물은 건축가 긴중업의 설계로 1959년에 지어진 것으로 근대 건축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건물 이라고한다 .

실제로 현재 김중업 박물관을 2014년 3월 오픈 예정에 있다.

 

그는 누구인가?서양 건축 1대 유학파, 김중업

 

고(故)김수근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연 건축가 김중업의 삶은 파란만장 했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김중업은 당시 일본에서는 드문 파리 유학파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를 만나 고전건축이 기저에 깔린 자신의 건축관을 형성한다.

1941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중업은 1945년 광복 이후 월남해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건축가 김중업의 삶은 세계적인 건축 명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나면서 큰 전환을 맞는다.

김중업이 르코르뷔지에를 만난 곳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예술가회의’였다.

이 행사에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에게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그의 건축연구소에 입소해 1955년까지 3년간 사사받았다.

1956년 2월 귀국한 김중업은 한 달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사무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 활동에 들어갔다.

프랑스에서 배운 서구의 근대건축과 한국적 미를 조화시키며 활동을 이어갔다.

‘서강대학교 본관’·‘주한 프랑스대사관’·‘제주대학 본관’·‘진해 해군 본부’ 등 규모가 큰 건물부터, 개인 주택 설계까지 활동 폭이 넓었다.

르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이 김중업의 삶의 빛이었다면, 그림자도 있었다. 김중업은 5·16 군사정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개발에 반발하며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1971년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197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김중업은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전성기였던 김중업은 해외 생활로 인해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설계 수주가 어렵자 김중업은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학교, 하버드 건축 대학원 객원 교수로 잠시 활동했다.

1978년 11월 귀국한 그는 그동안 축적했던 모든 역량을 발휘해 활동을 재개했다. ‘

한국교육개발원 신관’·‘욱일빌딩’·‘평화의 문’ 등이 이때 지어진 대표적 건물이다. 김중업은 1988년 5월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둔다.